빛의 과거 (2019) - 은희경
115:5
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맞은편 대열에서 응원을 보내기보다는 내 곁으로 와서 서는 것.
245:6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오로지 내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 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족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 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246:12
그들(서울 출신 학생들)은 부산을 포함해서 서울 이외의 곳은 다 '시골'로 칭하고 있었다. 또한 위도와는 상관없이 속초에서도 서울은 '올라오는' 도시였다. 나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곳으로 가기 위해 장대로 머리통을 맞아가며 버스표를 사려다 실패한 '시골'에도, 그리고 모두가 '올라온다'고 말하는 서울에도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264:9
오현수가 산동네의 집을 기웃거리고 문을 두드리며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다른 삶'의 실감이었다. 그녀는 산동네를 처음 가보았다. 물지게를 지고 계단을 오르는 꼬마들과 공용 화장실 앞에 늘어선 긴 줄도, 구멍이 숭숭 뚫린 듯 안이 들여다보이는 바라크 집도 처음 보았다. 이사 철에 대책 없이 집에서 쫓겨나 길에 나앉는 사람들과 추석을 앞두고 집을 비우고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279:2
긴 시간을 알고 지낸 사람들의 인생을 각기 포물선 그래프로 그려보면 뜻밖에도 서로 맞닿는 경우가 적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치 시소게임 같다. 한 사람이 오르막길로 상승할 때 다른 사람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언덕마루에 서서 경치를 내려다볼 때 다른 한 사람은 바닥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기도 한다. 아침에 볕이 들었던 자리가 저녁이 되면 싸늘해지듯 빛은 자리를 옮겨 다니는데 어둠은 규칙 없이 찾아온다.
281:14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319:16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329:12
혹시 지금까지 나를 왜곡시킨 힘들을 폭력이라고 생각하기보다 피할 수 없는 부당함이라고 받아들여버리는 비겁함이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333:19
"이런 건 그때그때 생색을 좀 내놓아야 해. 안 그러면 도움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단 말야. 인간들은 다 자기를 주인공으로 편집해서 기억하는 법이거든."
(중략)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그녀는 그 문장을 쓴 영국 작가의 책에서 한 줄을 더 인용했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최근에 읽었던 책의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 전의 유성우로 지금 존재하는 커다른 호수를 설명할 수 있다."
어차피 우리(나 김유경과 김희진)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337:15
우리 둘 중 누군가의 기억이 틀린 것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
【 작가의 말 】
340:5
— 그럴듯함, 을 경계하자. 가장 비겁하고 천박한 것.
— 자꾸 외연을 넓힌다. 힘이 덜 빠진 것이다. 힘을 잘 빼면 안 무거워지는 한편 안 가벼워진다.
— 왜 집중이 안 돼? 아무 쓸모 없는 화려한 문장만 공들여 만들고 있다니. 이게 공허한 무기 자랑이 아니고 뭔가.
결국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버리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