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2022)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 프롤로그 ]
8:18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 과거라는 목줄 ]
31:6
그러자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곧 생각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생각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무비판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수행하지 않은 정신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우리의 정체성과 생각이 불가분의 관계라고 느끼는 것 말입니다.
긍정적 사고를 권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긍정적 사고가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것인 일시적인 눈속임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그럼 아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면 어떨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우리 뇌는 애초에 부정형으로, 즉 무언가를 없애는 방향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해도,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면 앞으로의 삶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유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로 이어지며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생각을 어떻게 내려놓을까요? 일단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우리의 관심입니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47:8
저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자기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모르는 번민으로 가득한 어린 중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사소한 일에도 당사자는 죽을 듯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도 인생의 진실이지요.
[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 않는다 ]
57:8
사실상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쉼 없이 떠들고 울먹이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독설을 날리고 의문을 제기하고 불평을 일삼는 내 생각과 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진정시키려 애써도 제 마음은 끊임없이 인신공격과 자기 회의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59:18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 살면서 이보다 더 도움이 됐던 말은 별로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타고난 초능력을 간과한 채로 살아갑니다. 자기 생각에 의심을 품으며 조금은 거리를 두거나 우스갯거리 삼아 가볍게 접근한다면 자기답게 살아가기가 무한히 쉬워지는데 말이지요.
(중략) 떠오르는 생각을 거르지 못하고 다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가 되어 수시로 상처받습니다. 인생의 어떤 영역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제 상처에 신경 쓰느라 지혜로운 선택도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생각을 모두 믿어버린다면 우리 삶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에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말 그대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는 삶에서 존엄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유는 또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그 생각은 대부분 의도치 않게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간에 길러진 방식, 그동안 경험한 것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타고난 것들, 우리가 속한 문화와 환경 그리고 인생 여정에서 마주치는 메시지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됩니다. 생각 또한 그 산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 생각이 어떤 양상을 취할지라도 통제하지 못하지요. 다만 어떤 생각은 더 오래 품으며 고취할 수 있고, 어떤 생각에는 최대한 작은 공간만을 내줄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순간의 지성 ]
84:4
우리는 인간이 지식에 도달하는 방식이 한 가지 이상 있다는 점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이성이 우리의 도구함에 들어 있는 유일한 도구가 아니라는 점도 자꾸만 간과하게 됩니다. 저는 이성이 별 의미 없는 특성이라거나 덜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은 우리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수없이 제공했습니다. 기술, 과학, 의료, 민주주의, 평등 등 소중한 발상과 체제가 만들어지는 원천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성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식에 도달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한 다른 방식도 있습니다. 바로 영감의 순간입니다. 불교도들은 이를 지혜라고 부릅니다. 아울러 그들은 명상과 지혜는 확고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86:2
그러나 그 지혜는 요란스러운 자아와 달리 은은해서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던지는 질문과 요구는 그보다 몇 배나 시끄러워 지혜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따금 주파수를 바꾸는 것은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끼는 겁니다. 정적의 순간을 찾는 것이지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의 관심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요란한 소리에 쏠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막장 드라마가 되어버립니다. 갈등에 끌리고, 불안과 불행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항시 현실과 투쟁하게 되지요.
87:15
현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예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성적인 마음은 하인이다. 반면에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산물이다. 우리가 창조한 사회는 하인을 섬기느라 선물을 잊어버렸다."
[ 괴짜들의 공동체 ]
92:2
게다가 다들 하나같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때로 사람들은 그토록 신경에 거슬리는 걸까요? 저는 짜증으로 가득 차곤 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제가 기대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품었던 반감은 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제 안에서 너그러운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제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주지 스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를 대할 때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해변에 쓸려온 자갈과 같다네. 처음엔 거칠고 들쭉날쭉하지. 그런데 삶이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온다네. 우리가 그곳에 머물며 다른 자갈들 사이에서 거칠게 밀치고 비비다 보면, 날카로운 모서리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닳게 된다네. 결국 둥글로 매끄러워지지. 그러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게 될 걸세.
94:16
우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리하여 모두 본연의 모습래도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할 때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각자의 강점과 재능을 발휘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할 기회를 서로 상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남들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고 느끼면, 우리 또한 남들을 더 너그럽게 대하기 쉽습니다. 주변을 더 공감하는 자세로 관찰하고 또 그들과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95:11
어떤 오클라호마주 출신의 승려는 무려 4년 동안이나 저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매일매일 조금도 감추지 않고, 쉬지도 않고 싫은 마음을 어떻게든 드러내곤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삶이란 참 역설적이다 싶습니다. 저는 늘 남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나치게 신경 쓰며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그토록 열심히 일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게는 그처럼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누군가가 저를 미워할까 봐 그토록 두려워했는데, 이유도 모른 채 그리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미움을 받고 나니 그제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쓰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우친 것입니다.
[ 곰돌이 푸의 지혜 ]
118:18
지식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자랑한다. 지혜는 자신이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하다.
글귀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매달리면, 어떤 경험이나 배움도 우리에게 스며들 수 없게 되어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더 높은 지혜에 도달하고 싶다면, 신념과 확신을 살짝 내려놓고 우리가 실은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 모른다는 점을 알면,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는 일이 좀체 없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매달리며 살아간다면, 어떻게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 내면을 확장하고, 다른 방법을 고안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아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셋이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내면의 지혜에 귀를 닫고서 자기 생각에만 매몰되어 확신이 가득한 사람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의 지혜가 담긴 명작 동화 「곰돌이 푸」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푸와 피글렛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푸와 분홍색 수영복을 입은 피글렛이 눈앞에 선하지 않나요? 두 친구는 토끼네 집에 잠시 들렀다가 나오는 길입니다. 푸가 말했습니다. "토끼는 참 영리해." "맞아. 토끼는 참 영리해." 피글렛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게다가 토끼는 머리가 똑똑해." 푸가 칭찬을 계속했습니다. "맞아. 토끼는 머리가 좋아." 피글렛이 다시 맞장구를 쳤습니다. 둘 사이에 한참 침묵이 어어지더니 푸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토끼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봐."
누구든 공감할 이야기일 겁니다. 자기 생각의 안개에 갇힌 사람들은 현재에 관심을 온전히 쏟지 못하지요. 생각은 이리저리 뻗어나갈지언정 그들의 시야는 극히 좁습니다. 토끼는 머리가 좋고 영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토끼와 곰돌이 푸 중에서 누구로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제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내면의 곰돌이 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푸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각과 마음을 깨우고, 매순간의 새로움을 알아차리며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마법의 주문 ]
134:1
인간은 본래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는 못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습니다.
[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은 ]
148:2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입니다. (중략) 그러나 마음의 고통이 내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더라도 아픔이 덜해지진 않습니다. 그 앎 자체로는 조금도 고통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 사실을 이해하면 고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믿지 말아야 하는 주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50:2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탓하기 좋아합니다. (중략) 하지만 불쾌하고 불편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나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세상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변화의 방향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대체로 무관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누군가가 우리 생각대로 바뀌어야만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압박감, 슬픔, 외로움, 불안, 초라한 기분에 시달린다면 보통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며 좀처럼 놓지 못하는 어떤 '생각'이 불행감을 초래하는 겁니다. (중략)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마구 날뛸 때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먼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멀어집니다. 그러고는 말하는 겁니다.
' 그래,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 기적이 일어날 여지 ]
174:6
그즈음 저는 실제로 몹시 힘들고 지쳐 있었습니다. 신경도 갈수록 날카로워졌어요. 꽉 쥔 주먹을 활짝 펴고자 열심히 그리고 자주 수행해야 했습니다. 제게 떨어진 행정 업무가 늘어날수록 스트레스도 덩달아 늘어났습니다. 승려가 스트레스에 시달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알다시피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통제하려는 욕구를 내려놓기가 더 어렵습니다.
(중략) 스님은 온화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나티코, 기적이 일어날 여지를 꼭 남겨두세요."
그 순간 제가 꼭 들어야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잊고 있었던 진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스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실제로 저는 모든 걸 통제하려 들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룩 삶은 외롭고 고달프며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법인데 말이지요. 삶을 좀 더 믿고 맡겨야 했습니다. 삶에서 가장 좋았던 일들은 거의 대부분이 제 계획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지시하고 예측하려 들수록 즐거움은 사라지고 더 괴로워집니다. 긴장할수록 지성의 일부가 사그라질 뿐이지요.
176:3
"... 떠오르는 생각을 무작정 믿지 않아야 합니다.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상황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우주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운행된다는 근본적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진실이 뭐냐고요?"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절한 계획을 반드시 세워야 할 때조차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지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예견하려는 헛된 시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럴 용기가 있다면 기적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 한 가지는 확실하다 ]
183:14
문득 예전에 태국의 스승님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질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항상 가질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제가 욕구를 채우려는 집착을 버릴 때마다 그 욕구다 더 쉽게 충족되었습니다.
185:2
어떻게 하면 삶이 펼쳐지는 데 잘 대응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미래의 계획과 통제와 조직에 덜 신경쓰고 현재에 더 충실하면 됩니다. 완전한 몰입에 빠졌을 때의 기분을 아실 겁니다. 기민하게 주의를 집중하게 되지요. 알아차림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순간에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은 닥치지도 않은 온갖 일에 대응할 방법을 궁리하면서, 혹시나 잘못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숙고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갈지를 끊임없이 걱정하지도 않지요.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히 대응합니다. 더 현명한 방법이지요.
186:5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하지, 계획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186:14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도약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 이뤄집니다. 우리의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참아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현명해집니다. 삶을 뜻대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자연의 속성입니다.
사원 생활은 삶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타고난 의지를 좌절시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만지지도 못했고, 언제 무엇을 먹을지 또 누구와 살고 어느 오두막에서 잘지 선택하지도 못했습니다. 승려가 되면 과거에는 당연한 권리였던 선택들을 모두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수행은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을 안겨줍니다. 삶이 불확실해질 때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앞날을 모를 때도 내면의 평화를 지킬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헛된 노력을 덜 기울이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믿음과 미래에 덜 집착하고, 삶이 실제로 벌어지는 유일한 장소인 지금 여기에 더 마음을 여는 과정입니다.
[ 반지 안의 비밀 ]
216:19
페르시아의 한 임금이 전설에 남을 만큼 지혜롭게 왕국을 통치했다고 합니다. 백성 중에서 한 남자가 임금의 현명한 통치 이면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남자는 몇 주 동안 헤매다 마침내 왕궁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임금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남자는 임금 앞에 엎드려 물었지요. "존경하는 임금님, 우리나라를 이토록 정의롭고 복되고 훌륭한 방식으로 다스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임ㄱ므은 황금 반지를 꺼내 방문객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 반지 안쪽에 그 비밀이 숨어 있노라." 남자는 반지를 받아서 불빛에 대고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열린 문으로 들어가다 ]
231:5
"하지만 비욘, 믿음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아이들도 돌봐야 하고 식탁에 올릴 음식도 마련해야 해요."
저는 이론 반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믿음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늘 비슷한 의문을 품었으니까요. 그래서 간밤에 뜬눈으로 지새우며 뭐라고 대답할지 열심히 궁리해두었습니다. "그야 물론이죠, 틸데. 당신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믿음이 늘 해답이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죠. 어떤 상황은 반드시 통제해야 하니까요. 우리가 이슬람교라고 부르는 지혜의 보고로 잠시 눈을 돌려볼까요. 이슬람교에는 금언이 참 많은데, 특히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엔 이런 문구가 있어요. 알라신을 믿되 타고 갈 낙타는 묶어두라."
재미있긴 하지만 그냥 웃자고 한 말은 아닙니다. 저는 이 지혜로운 금언을 좋아해서 늘 마음에 품고 다닙니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히면,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 죽음이 찾아오는 모습 ]
250: 20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들에게 주지 말라. 가령, 청하지도 않은 조언 같은 것은 건네지 말라.'
[ 네가 세상에서 더 보고 싶은 것 ]
275:3
존재는 공명共鳴합니다. 우주는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의도에 반응합니다. 우리가 내보낸 것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세상은 세상 그 자체의 모습으로서 존재하지 않지요. 세상은 우리의 모습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문득 해변을 산책하던 어린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밤새 몰아치던 폭풍우가 물러난 아침, 파도에 휩쓸려 온 불가사리가 해변에 수도 없이 널려 있었습니다. 아이는 불가사리를 하나 집어 들어 바다로 던졌습니다. 또 하나를 주워 그것도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꼬마야, 지금 뭐 하니?"
"불가사리를 바다로 돌려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얘야, 이 해변엔 수십만은 못 되더라도 수만 마리나 되는 불가사리가 널려 있단다. 네가 몇 마리 구해준다고 별 차이가 있겠니?"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가사리를 또 집어서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쟤한테는 큰 차이가 있죠."
277:8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 몹시 거슬리는 한 마디 ]
293:17
화난 사람에게 절대로 내려놓으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상대를 자극할 뿐이니까요. 내려놓으라고 말해야 할 상대는 자기 자신뿐입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
300:9
'지금 제게 정말로, 진실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 상황(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중)에선 이 질문이 특별히 더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제일 먼저, 남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덜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러고 싶지 않을 때조차 저도 모르게 늘 그것부터 챙기곤 했지요.
반면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해졌습니다. 대다수 사람이 저와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잘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