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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믿음의 교감 ]
21:11
정초에 친정어머니께 세배 드리러 갔다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대소가가 함께 한자리에 끼게 됐다.
(...)
거액을 사기당한 얘기로부터 버스 칸에서 가방을 받아준 고마운 아줌마에 의해 만년필을 소매치기당한 얘기까지, 도시 고위층의 공약에 속은 얘기로부터 100원짜리 상품의 용량에 속고, 바겐세일의 반값에 속은 얘기까지 두루두루 속은 얘기들로 경합을 벌이다 보니 언성이 높아지고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그건 분명히 유쾌한 화제가 못 되었을 텐데도 우린 어느 틈에 그걸 즐기고 있었다. 미담보다는 악담에 더 정열적인 게 천박한 기질이라는 걸 돌볼 겨를도 없었다.
이때 언제부턴지 우리의 이야기판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던 팔십 노모께서 혼잣말처럼 한마디하셨다.
"난 원 복도 많지. 이 나이에 그런 못된 사람들을 별로 못 겪어봤으니......"
어머니의 이런 말씀은 우리의 소리 높은 악담 속에서 아무런 흥미도 못 끌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세속적인 의미로 과히 복 좋은 노인도 못 됐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하실 때의 어머니가 기를 쓰고 악담을 하는 우리보다 훨씬 곱고 깨끗하고 행복해 보이시는 걸 나는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그런 무안을 당하긴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요새는 근력이 안 좋으셔서 못 다니시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절에 열심히 다니셔서 나도 가끔 모시고 가봤었는데 그때마다 절의 속악한 분위기라든가 스님과 신도들간의 상업적인 관계 등에 대해 나는 꽤 악랄한 비평을 했었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이렇게 나무라셨다.
"원 뭐 눈엔 X밖에 안 뵌다더니......, 넌 어째 그런 것밖에 못 보냐? 난 부처님 한 분 우러르기에 그저 감지덕지하느라 그런 건 눈 귀에도 안 들어오더니만......"
보는 눈에 따라 이렇게 한 가지 사물, 동일한 현상도 정반대로 보이는 수는 부지기수다.
사람을 믿었다가 속았을 때처럼 억울한 적은 없고, 억울한 것처럼 고약한 느낌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떡하든지 그 억울한 느낌만은 되풀이해서 당하지 않으려든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만나는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믿었다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에 해당하겠지만 못 믿었던 것이 실상은 믿을 만한 거였다는 것 역시 배신당한 것일 수밖에 없겠고 배신의 확률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높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 있게 못된 사람 만난 일 없다고 술회할 수 있듯이 세상엔 믿을 만한 게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 새해 소망 ]
177:4
또 한 살 먹는구나. 설이 심란하다가도 몰라보게 자랐을 손자들 조카들 세배 받을 생각을 하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어렸을 적에 늙은 사람을 보면 저렇게 늙어서도 사는 재미가 있을까 의심했었는데 사는 재미란 죽는 날까지도 있게 마련인가 보다.
(...) 요새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문제를 입시와 결혼으로 간단하게 요약해버리려는 우리 세대의 사고방식과 상상력의 빈곤에 문득 혐오감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이럴 때야 당하는 젊은이는 얼마나 진저리가 날까 싶기도 하다.
올해는 그런 상투적인 수작은 생략하고 잘 먹이고 저희끼리 실컷 떠들게 하고 나중에 세뱃돈이나 듬뿍 주어 보낼까 보다. (...)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시어머니는 설날에 아이들 키를 재시는 게 큰 낙이셨다. 때때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을 엄숙한 얼굴로 하나하나 불러 기둥 앞에 세우시곤 막대기 같은 걸로 정수리를 가볍게 누르고 송곳으로 기둥에다 금을 그으셨다. 그러고는 작년 이맘때 낸 금과 대보면서 아이구 한 뼘은 자랐네, 또는 한 치는 자랐구나 하셨다. 밥은 잘 안 먹고 주전부리만 하더니, 여봐라, 닷 분도 못 자랐잖냐? 하고 야단을 치시기도 했다. 할머니한테 이런 야단을 맞은 아이는 그날 떡국부터 많이 먹어야 했고 주전부리할 때마다 눈치를 봐야 했다.
(...)
올해부터 나도 세배 오는 손자들 키나 재볼까. 해마다 키를 재보고 잘 먹고 무병해서 키가 많이 자란 놈을 칭찬해주는 할머니가 성적부터 묻고 안달을 하는 할머니보다 훨씬 귀여울 것 같다. 젊은이가 들으면 어느새 망령 났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귀엽게 늙고 싶은 게 새해 소망이다.
[ 중년 여인의 허기증 ]
208:5
나는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오랜 갈망과 수업 끝에 등단하게 되었는지, 등단이라는 걸 하고 나서 작가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그걸 잘 모르겠다. 그런 낌새란 누구에게나 그렇게 모호한 건지 내 경우만 그런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970년 봄 어느 날 단골 미장원에 가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뒤적이던 「여성동아」에서 여류 장편소설 모집이란 공고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대며 소설을 쓰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여성동아」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그전까지의 나는 문학 지망생이었다기보다는 문학 애호가였다고나 할까. 매달 애독하는 문예지도 있었고,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추천제나 신춘문예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 만큼은 알고 있었는데, 그런 데 단 한 번도 응모해본 적이 없었고, 응모하고 싶어본 적도 없었는데, 느닷없이 「여성동아」의 공고란에 강하게 사로잡혔던 것이다.
응모 마감까지는 3개월 남짓 남아 있었다. 나는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십에 처음 해보는 이 일에 대해 가족들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탔다. 그래서 철저하게 몰래하기로 작정했다. 가족들 몰래 그 일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평생 처음 나만의 일을 가졌다는 것과, 가족들에게 비밀을 가졌다는 것으로 매일매일 아슬아슬하리만큼 긴장했고, 행복했고, 그리고 고단했다.
나는 그것을 쓰면서 혹시 당선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려들지 않았다. 7월 15일이 마감이어서, 7월달로 접어들면서는 하루 꼬박 40장씩 쓰는 중노동을 했고, 그래서 그런지 그해 7월처럼 뜨거웠던 여름은 다시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열기가 7월의 열기였는지 40세에 별안안 불타오른 문학에의 정열이었는지 그것 또한 지금 생각하면 아리송하다. 꼭 뭣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그 고달픈 작업에 몰입했다.
가뜩이나 마른 나는 더 형편없이 마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처녀작 「나목」을 탈고한 게 7월 14일이었다. 1,200장 정도의 원고 부피를 보자 나는 끔찍한 생각이 나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한마디로 지긋지긋했다. 그래도 단단히 포장을 하고 규정대로 겉봉을 써서 우송까지 끝마쳤다. 돌아오는 길은 날아갈 듯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무 허전해 울고 싶었다. 이제부터 집에 가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식구들을 위해 장을 보고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일, 매일매일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아 쾌적하고 정갈한 생활환경을 만드는 일, 아이들 공부를 돌보고 가끔 학교 출입을 하는 일, 뜨개질, 옷 만들기 -- 소위 살림이라 불리는 이런 일들을 나는 잘했고, 또 좋아했지만, 아무리 죽자꾸나 이런 일을 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허한 구석을 나는 내 내부에 갖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날 온종일, 어디서 소포 뭉치가 되어 뒹굴고 있을 내 작품에 대한 육친애와도 방불한 짙은 연민으로 거의 흐느낄 것 같았다. 나는 또 내 원고를 딴 소포들과 함께 마구 천대할 우체국 직원을 가상하고 앙심을 품기까지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심지어는 심사위원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오로지 내 악필만 보고 내 작품을 구박하고 조소할지도 모르는 심사위원 -- 무더위를 핑계로 작품을 무성의하게 대강대강 읽어 넘길 심사위원, 숫제 읽지도 않을 심사위원을 가상하고 혼자서 속을 썩이고 분통을 터뜨리고 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만일 내 작품이 당선이 안 되면 그건 순전히 심사위원들의 무정견 때문이지 결코 내 작품이 남의 것만 못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들었다. 마치 덮어놓고 제 자식 잘난 줄만 알고, 제 자식 역성만 드는 어리석은 엄마 같은 맹목의 애정을 나는 이미 내 앞을 떠나 있는 내 첫 작품에 대해 느꼈다. 그리고 비로소 글은 아무렇게나 쓸 게 아니라는, 글을 하나 써내는 것도 자식을 하나 낳아 놓는 것만큼 책임이 무거운 큰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9월 초순 당선 통지를 받았다. 의외였다. 당선이 의외가 아니라 너무 일러서 의외였다. 잡지 사정을 잘 모르는 나는 11월호에 발표되니까 10월달쯤이나 알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선을 통고해 온 분들이 기분이 어떠냐고 그러기에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막상 당하고 보면 그렇게 기쁜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굉장히 기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도 좋아서 날뛰길래 뭐가 그렇게 좋으냐니까 둘째 아이든가 셋째 아이든가, 가정환경 조사서에 엄마 직업을 '무'가 아니라 '작가'라고 쓸 생각을 하면 막 신이 난다고 했다. 나는 그 애의 말에 깔깔대고 웃었지만 속으론 뜨끔했다. 나는 실상 내 애들만큼도 장차 내가 소설가가 될 각오가 서 있지를 않았다.
당선이 되었으니 약속대로 50만 원은 줄 테지, 약속대로 내 글을 활자로도 만들어주겠지(그때는 내 글이 활자가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즐거운데 '직업이 작가'는 도저히 못 해 먹을 것 같았다.
시상식은 10월 초순에 있었다. 나는 왠지 그 시상식이라는 게 싫었다. 돈이나 주면 됐지 시상식은 뭣하러 하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누구에게나 함부로 투덜거렸다. 시상식엔 동창들이 몇 왔다. 그래서 쑥스러운 대로 꽃다발이란 것 받고 사진도 찍고 점심도 먹었다. 한 친구가 이렇게들 모이기 쉽지 않은데 저희 집으로 같이들 가자고 했다. 그 친구 집에서 한바탕 떠들고 나서 화투판이 벌어졌다. 나는 별안간 핸드백에서 방금 탄 50만 원짜리의 보증수표를 꺼내 친구들한테 회람을 돌리면서, 너희들은 50만 원을 만들려면 2년이나 3년 죽자꾸나 계를 부어야 되지만 나는 이것을 얼마나 쉽게,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로 만든 줄 아느냐고 막 으스댔다. 그리고 화투판에 끼지 않고 집으로 왔다. 친구들이 50만 원 날릴까 봐 줄행랑치기냐고 놀렸지만 그렇게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직 안 돌아온 집은 조용했다. 나는 다시 50만 원을 꺼냈다. 우리는 겨우겨우 사는 정도의 살림 형편이었지만 당장 50만 원의 긴요한 용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간의 며칠 동안을 왜 그렇게 50만 원에 집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수표를 아무렇게나 서랍 속에 들이뜨렸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공허감이 왔다.
책이 나오고 나서 거의 매일 독자로부터의 편지라는 걸 받았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리고 외국에서 오는 것도 꽤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해하고, 활자의 위력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 하고 감탄도 했다. 별의별 편지가 다 있었다. 나를 무슨 위대한 작가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시골 소녀의 동경이 가득 담긴 간지러운 편지가 있는가 하면, 가정부인의 고마운 격려의 편지도 있었고, 상금을 나눠 먹자는 협박 섞인 편지도 있었다. 그라나 정작 내 작품을 읽고 내가 그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고 보내오는 편지는 거의 없었다. 나는 많은 편지 속에서 허망감을 짓씹었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작업인가를 알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당선을 전후한 시기의 내심의 혼란과 흥분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 내부에서 새로운 고민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즉 당선작을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조용히 사라져 가느냐, 당선이라는 사실을, 앞으로의 작가 생활로 이어질 발판으로 삼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 처음에서도 언급했지만 내가 하나의 작품을 이룩한 게 작가가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나 준엄한 각오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중년으로 접어든 여자의 일종의 허기증에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글쓰기란 내 또래 중년 여인들이 흔히 빠져드는 화투치기, 춤추기, 관광여행하고 무엇이 다른가. 문학이란 절대로 심심풀이 삼아 할 수 있는 안이한 게 아니지 않나. 나도 문학 애호가의 입장에서 문학이란 것에 대해 그만한 까다로운 주문을 할 줄도 알았고, 안이하게 낳는 문학에 대해 경멸을 보낼 줄 아는 안목도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문학이라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작업에 모든 것을 걸어보느냐, 아니면 다시 일상의 안일에 깊숙이 함몰할 것인가를 놓고 나는 고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작가로서의 창조적 능력에 대해서도 회의를 거듭했다.
우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겸, 개발도 할 겸, 하나둘 습작을 시작했다. 지독하게 열심히 했다. 밤잠을 설치고, 입맛을 놓치고, 남의 좋은 글을 읽고 샘을 내고, 발표의 가망도 없는 글을 썼다. 차차 글 쓰는 어려움에 눈 떴다. 자연히 쉽게 쓴 글이 쉽게 당선된 데서 비롯된 내심의 은밀한 오만도 숨이 죽었다.
당선작을 쓰고 나서 습작을 썼으니 순서가 거꾸로 됐지만 그 시기는 당선작을 쓴 시기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시기였다.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 곧 「여성동아」에서 연재의 기회를 주었고 그 후 여러 지면의 비교적 고른 혜택을 받고 보니 어름어름 작가인 척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자랑할 거라곤 지급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4년 전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다.
[ 나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 ]
236:6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서도 연민할 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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