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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겪은 흥미로운 사건을 질투한다. 하지만 이 경우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재미있게 묘사할 줄 아는 타인의 이해력을 탐내야 한다. 재치 있는 사람은 똑같은 사건이라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지만, 평범한 두뇌를 소유한 자는 고리타분한 일상의 한 단면으로만 생각한다. 괴테와 바이런이 지은 여러 편의 시가 바로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을 주제로 쓰인 사실만 봐도 그렇다. 우매한 독자는 시인이 겪은 매력적인 순간이 부러울 뿐, 완전히 평범한 사건을 위대하고 아름다운 순간으로 그려낸 시인의 대단한 상상력은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울한 자는 어떤 사건을 두고 슬픈 장면으로 기억하고 쾌활한 자는 흥미로운 논쟁거리로 생각하며, 무기력한 자는 그저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가 버린다.

(...) 객관적인 절반이 같아도 주관적인 절반이 다르거나, 반대로 주관적인 절반이 같고 객관적인 절반이 다르면 현재의 현실은 완전히 달라진다. 가장 멋지고 훌륭한 객관적 절반을 가졌어도 무디고 나쁜 주관적 절반을 가졌다면 현실과 현재 역시 그다지 좋지 않게 인식한다.

 

17:15

현재와 현실의 객관적 절반은 운명의 손아귀에 있으므로 상황에 맞춰 변할 수 있다. 주관적 절반은 바로 우리 자신이므로 이 주관적 절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의 삶은 외부의 온갖 변화에도 일반적으로 같은 특성을 유지한다. 마치 한 주제로 펼쳐지는 여러 변주곡이라 할 수 있다.
자기 개성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 각자의 개성에 근거하여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한도가 정해져 있다. 특히 정신력의 한계는 높은 수준의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지점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정신력의 한계선이 낮으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외부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까지 다다를 힘이 없다. 이런 인간의 반쯤은 동물적 감각에 따른 행복과 즐거움을 넘어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 깊은 만족감은 정신력이 좌우한다. 정신력을 보면 행복이 우리의 본질, 즉 인격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확실해진다. 대다수 사람은 우리의 소유물이나 외면에 따라 결정되는 운명만을 고려하는 데 그친다. 물론 운명은 나아질 수 있다. 한편 내면이 풍요로운 자는 바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멍청이는 끝까지 멍청이로, 바보는 끝까지 바보로 남는다.

 

20:6

총명한 사람은 온전히 홀로 있을 때조차 자신만의 생각과 상상만으로 큰 즐거움을 얻는다. 반면에 아둔한 자는 아무리 사교 활동, 연극, 유흥거리를 즐겨도 고통스러운 권태로움을 피할 도리가 없다. 선하고 절제하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는 환경이 곤궁해도 만족을 찾는다. 하지만 탐욕스럽고 남을 시기하는 악한 사람은 아무리 부자여도 만족을 모른다. 하지만 비범하고 뛰어난 정신을 지닌 인격을 추가하는 자는 대다수 사람이 좇는 향락을 번거롭고 성가시다고 생각한다.

 

23:15

실제적인 풍요, 즉 넘치는 부는 우리의 행복에는 별다른 쓸모가 없다. 많은 부자가 불행한 이유는 지적 교양이나 지식이 없어서 심리적인 만족감을 선사하는 기반이 되는 어떤 객관적 관심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부유함은 현실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채우는 일 외에 인간의 참된 행복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과도한 재산을 유지하느라 발생하는 불필요한 수많은 근심은 만족스러운 삶에 방해물이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 치중한 나머지 지적인 교양을 쌓는 일에는 뒷전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소유물보다 행복에 이바지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게 일하는 개미처럼 이미 쌓아둔 재산을 더 불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이런 사람들은 재물을 불리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좁은 시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영혼은 공허하여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여력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최고의 향락인 정신적 향락에 도달하지 못한다. 시간을 적게 들여 찰나의 물질적 향락으로 정신적 향락을 대신하려 해보지만, 모두 헛될 뿐이다.

 

30:16

고상한 성격과 뛰어난 지능, 낙천적 기질과 쾌활한 마음, 강인하고 튼튼한 몸, 즉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사실은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적 재산이나 외부의 명예를 얻기 보다 위에 언급한 자산들을 얻고 불리는 데 힘써야 한다.
이런 자산 가운데서도 우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는 바로 쾌활한 마음이다. 이런 좋은 특성은 즉시 보답을 받기 때문이다. 즐거운 사람은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즐겁기 때문이다. 이 특성만큼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만한 자산은 없다. (...)
젊은 시절 나는 고서를 보다가 이런 글귀를 읽었다.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하고 많이 우는 사람은 불행하다.' 아주 간결하지만 절대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다. (...)
쾌활함에 가장 크게 공헌하는 요소는 돈이 아니라 바로 건강이다. (...) 모든 생활 과정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소소한 활동만이 아니라 전신에 움직임이 필요하다.

 

33:18

인간은 건강 상태에 따라 외부 상황이 다르게 인식된다. 건강하고 활달한 상태와 질병으로 불쾌하고 소심한 상태에서 받는 인상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우리의 견해다. 이에 관해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에 따라 움직인다.' 대체로 행복의 90퍼센트는 건강에 달려 있다. 건강은 모든 향락의 원천이다.

 

36:10

(...) 차이는 인간이 유쾌함과 불쾌함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다른 데에 원인이 있다. 누군가는 절망에 빠질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도 다른 누군가는 피식 웃고 넘겨버린다. 불쾌함에 대한 감수성이 강할수록 유쾌함에 대한 감수성은 약해지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건이 행복과 불행의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반반이라면 짜증 나는 사람은 불행한 일에 화를 내고 슬퍼하며 기뻐하지 않는다. 반면에 쾌활한 사람은 불행한 일에 화내거나 슬퍼하지 않고 행복한 일에 대해 기뻐한다. 짜증 나는 사람은 계획 열 개 중 아홉 개를 성공해도 실패한 한 가지 계획을 두고 분노한다. 쾌활한 사람은 반대로 한 가지 계획만 성공해도 스스로 위안을 얻고 명랑해진다.
짜증 나는 사람, 즉 음울하고 불안한 성격을 가진 자는 쾌활하고 긍정적인 사람에 비해 대체로 상상 속에서 재난과 고통을 자주 겪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드물게 일어난다.

 

40:6

정신이 풍요로워지면 지루함이 설 자리가 없다. 정신이 풍요로운 자는 무한히 활발한 사고 활동,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현상으로 새로워지는 지적 유희와 힘, 그 힘을 항상 다른 것과 조합하려는 의욕들에 차 있다. 이들의 비상한 두뇌는 찰나의 권태 이외에는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같은 고도의 지능은 직접적인 조건으로 높은 감수성이 필요하다. 이 조건은 격렬한 의지, 즉 열정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런 조건과 결합된 사람의 감정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예민하므로 정신과 육체적 고통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 그런 이유로 정신이 탁월한 자는 그리 사교적이지 않다. 물론 사교의 질을 양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더 큰 세상에서 살 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아쉽게도 멍청이 수백 명은 현명한 사람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43:10

평범한 인간은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집중하지만, 재능을 가진 사람은 시간을 활용할 줄 안다. 편협한 사고를 하는 자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지성이 의지를 위한 동기의 매개체 이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 동기가 없으면 의지는 휴면에 들어가고 지성은 멈춰버린다. 지성은 의지와 똑같이 혼자서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의 모든 힘이 끔찍한 정체기에 빠져버린다. 이것이 바로 지루함이다.

 

45:18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남이 줄 수 있는 것도 매우 좁은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인간은 모두 홀로 있으므로 그 홀로 된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이에 관해 괴테는 말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또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이렇게 썼다.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한다.
                                                                     「나그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에게 줘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많을수록, 향락의 원천을 자신 안에서 찾을수록 행복해진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자급자족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행복의 모든 외부 원천은 본래 아주 불안정하고 의심스러우며 우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주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막혀버리기 쉽다.
외적인 조건은 언제나 손에 닿는 거리에 있진 않으므로 이런 상황을 피할 도리는 없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외적인 조건은 필연적으로 고갈된다. 나이를 먹으면 사랑, 유머 감각, 여행으로 들뜨는 마음, 승마에 대한 애정도 사라져 사교계에도 적합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친구와 친척들도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다. 그럴 때는 이전보다 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그를 가장 오래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진정한 행복의 유일하고도 변치 않는 원천이 된다.

 

49:8

외적인 것을 취하기 위해 내적인 것을 상실하는 일, 즉 화려함, 지위, 사치, 직책, 명예를 위해 자신의 평안, 여유, 독립심을 완전히 또는 상당 부분 포기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다.

 

97:16

자부심 중에서 가장 값싼 종류의 자부심은 민족적 자부심이다. 민족적 자부심에 사로집힌 사람은 개인적으로 내세울 만한 장점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수백만 명과 공유하는 자부심을 내세울 리가 없다. 뛰어난 개인적 장점이 있는 사람은 자기 민족의 결점을 가장 분명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세상에 자랑할 게 없는 한심한 멍청이는 자기가 속한 민족에게 느끼는 자부심을 최후의 보루로 삼는다. 이런 식으로 그는 생기를 찾고 자기 민족의 온갖 결점과 어리석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고자 한다.

 

202:7

모든 삶의 범위에 제한을 두면 행복해진다. 인간의 시야, 활동이나 접촉 범위가 좁을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지고,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 자주 괴롭거나 두려워진다. 범위가 넓어지면 걱정, 욕망, 끔찍한 일도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204:14

완벽하게 사려 깊은 생활을 하고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가르침을 자신의 경험에서 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험하고, 행하고, 느꼈던 것을 자주 회상하며 개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판단을 비교하고, 자신의 의도와 열망을 결과물과 그 결과에 대한 만족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208:4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만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나는 모든 것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행복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 되뇌어야 한다. 행복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에게 있다.

 

227:6

시기심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인 동시에 죄악이고 불행이다. 인간은 시기심을 행복의 적이자 인간의 숨통을 막으려는 사악한 악마로 봐야 한다. 이에 대해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서술했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기뻐해라. 남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많은 사람이 너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너보다 뒤처져 따르고 있는지 생각하라.'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보다 사정이 나아 보이는 사람보다 사정이 나쁜 사람을 살펴야 한다. 실제로 재앙이 닥쳤을 때는 시기심과 같은 원천에서 나오는 위로가 가장 효과적이다. 바로 자기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다음으로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 즉 불행한 동료들과 함께하면 된다.

 

229:12

어떤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충분히 반복해서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철저히 고려한 후에도 인간의 의식은 불완전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의식의 불완전함은 조사와 예견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계산된 전체 계획을 잘못되게 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일단 결정을 내리고 작업에 착수하면 모든 일이 되어가는 대로 맡기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미 시작한 일에 관해 자꾸 생각하고 위험을 예상하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제 문제를 깨끗하게 잊고 모든 일을 제때 충분히 생각했다는 확신을 갖고 편안하게 이 문제가 들어 있는 서랍의 자물쇠를 채우는 편이 좋다.

 

231:4

불행한 일이 이미 일어났고 더는 돌이키지 못한다면, 그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피할 수 있었는지는 더더욱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고통이 심해져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이때 스스로를 자학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은 다윗왕처럼 처신해야 한다. 다윗왕은 아들이 병석에 누웠을 때 하느님에게 끝없이 애원하고 빌면서 매달렸다. 하지만 아들이 막상 죽고 나자 훌훌 털고 일어나 그 일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
이 규칙은 일방적이거나 불행이 닥쳤을 때 즉시 안도하고 침착해지는 데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대체로 불행에 대한 책임이 어느 부분 인간의 태만과 무모함에 있다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이 불행을 예방할 방법을 반복해서 생각해야 인간에게 교훈과 개선의 여지가 생기고, 유익한 자기 징벌이 된다. 
이때 명백한 자기 실수를 변명하고 미화하거나 최소화하지 말아야 한다. 실수를 인정하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확인하여 앞으로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다짐해야 한다. 물론 자신에 대한 커다른 고통과 불만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은 괴롭다. 하지만 '징벌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237:5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보면 쉽게 이런 생각을 한다. '저게 내 것이라면 어떨까?' 그러고는 부족함을 느낀다. 그보다는 종종 이렇게 질문하는 편이 좋다. '저게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나는 인간이 가진 것을 잃고 난 뒤 어떤 기분이 들지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재산, 건강, 친구, 사랑하는 사람, 아내, 자녀, 말, 개 등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가진 것을 잃는다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봐야 한다. 대체로 상실만이 물건의 가치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책에서 권유한 바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첫째로는 물건을 소유한 사실 자체를 예전보다 더 행복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둘째는 상실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 마련할 것이다. 즉 재산을 위험에 노출하지 않고, 친구의 화를 돋우지 않고, 아내의 정절을 시험하지 않고, 자녀의 건강을 챙길 것이다. 인간은 종종 흐릿한 현실을 억측하여 밝게 만들어 수없이 헛된 희망을 품곤 한다. 이런 희망은 환멸을 품고 있어 가혹한 현실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면 환멸은 피하지 못한다.

 

238:12

인간과 관련한 일이나 사건은 완전히 별개이며 순서도 없고, 서로 관련도 없고, 가장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고, 인간의 일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도 없이 무작위로 일어난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근심은 이에 걸맞게 두서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한 가지 일을 할 때 나머지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저마다 알맞은 시간에 처리하고, 즐기고, 인내해야 한다. 생각의 서랍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하나를 열 때는 다른 서랍들이 닫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무겁게 짓누르는 근심이 현재 누리는 작은 향락을 방해하거나 평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의 성찰이 다른 성찰을 밀어내지 않고, 중요한 일 한 가지에 신경 쓴다고 해서 많은 사소한 일을 소홀히 하는 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240:18

'생명이 본질은 움직임에 있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옳다. 인간의 육체적 생명은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과 정신적인 활동도 끊임없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
인간의 능력은 어딘가에 사용되기를 바라고 그 사용의 성과를 어떻게든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가증 큰 만족은 무언가를 '한다'는 관점이다. 바구니를 만들 수도 있고 책을 쓸 수도 있다. 자신의 손에서 매일 성장하고 마침내 완성에 도달하는 작품을 보면 직접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다.

 

251:3

세상을 헤쳐나가려면 신중한 태도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을 넉넉하게 가져야 한다. 신중하면 손해와 상실을 막을 수 있고, 관용을 베풀면 논쟁과 다툼을 피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자는 자연이 만든 본성이 그러하다면 어떤 개성도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 개성이 아무리 최악이거나 한심하거나 우스꽝스러워도 상관없다. 도리어 이런 개성을 변할 수 없는, 영원하고 형이상학적 원칙의 결과로서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는 '그런 괴이한 존재도 세상에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생사를 건 전쟁을 도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의 본래 개성, 즉 그의 도덕적 성격, 인식 능력, 기질, 인상 등은 아무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상대방의 본성을 전적으로 비난하면 상대는 그 인간을 숙적으로 여겨 싸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 인간이 상대를 불변이 아닌 다른 것이 된다는 조건에서만 존재할 권리를 부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면 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모든 이의 타고난 개성을 인정하고, 그 개성을 종류와 성질에 따라 이용하겠다는 생각만 하면 된다. 개성이 변하길 기대하거나 개성 그 자체를 전적으로 비난만해선 안 된다. 이것이 '서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자.'라는 격언의 진정한 의미다.
(...)
누군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때 무생물이 본성에서 기인한 필연성 때문에 그런 것처럼 인간도 그런 필연성으로 행동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거추장스러운 인간의 행동에 분노하는 일은 인도에 굴러온 돌을 보고 화내는 일만큼이나 어리석다.

 

279:9

사교 모임에서 환심을 살 수단으로 재능과 지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출내기다! 재능과 지성을 보여주면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다수가 증오와 원한을 품게 된다. 증오와 원한의 근거가 된 재능과 지성을 비난하는 게 정당하지 않을수록 증오와 원한을 감추면 더 격렬해진다.

 

288:4

누군가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면 일단 믿는 척 해라. 그러면 상대는 대담해져 더 심한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거짓을 폭로당한다. 반대로 상대가 숨기고 싶은 진실 일부가 그에게서 누설되었다면 그것을 불신하는 시늉을 해라. 그러면 상대는 나의 반박에 자극을 받아 모든 진실을 하나씩 털어놓을 것이다.

 

288:10

사적인 일은 비밀로 하고, 친한 지인이라 해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사실 이외에는 완전히 모르는 채로 남겨두어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라도 남에 관한 지식이 시간과 상황에 따라 인간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자신의 지성을 드러내기에 좋다. 침묵은 신중함의 문제이고 말은 허영심의 문제다. 이 두 가지 일에 주어지는 기회는 똑같은 빈도로 자주 온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침묵이 주는 지속적 이익보다 말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감을 선호할 때가 있다. 어쩌다 한번 혼잣말로 크게 외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활기찬 사람에게는 있을 법한 일이지만 습관이 되지 않도록 자제하는 편이 낫다. 버릇처럼 혼잣말하다 보면 사상과 말이 친숙해져 다른 사람과 대화할 대도 점차 생각이 말로 튀어나올 수 있다. 생각과 말 사이에 넓은 틈을 벌려두어야 현명하다.

 

290:19

남에게 속아서 쓴 돈보다 유익하게 사용한 돈은 없다. 인간은 그 일을 겪고서 직접적인 현명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292:11

인간의 삶이 나타나는 형태는 달라도 삶의 요소는 항상 같다. 따라서 오두막이든 궁정이든, 수도원이든 군대든 본질에서는 모두 똑같은 삶이 펼쳐진다. 인생의 사건, 모험, 행운과 불행이 아무리 다양해도 이는 설탕 과자와 같다. 여러 형태나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어도 결국 한 반죽덩어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유사하다. 후자가 전자의 말을 듣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슷하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일도 만화경 속 그림과 같다. 통을 돌릴 때마다 다른 그림이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눈앞에 항상 같은 것을 두고 본다.

 

302:5

어떤 일 앞에서도 크게 환호하거나 너무 비탄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가변성이 있으므로 언제든지 형세가 바뀔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불리한지 판단하는 데 속임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가 크게 통곡했던 일이 나중에 가장 최선이었다거나 크게 기뻤던 일이 가장 큰 고통의 원천이 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어떤 재난이 닥쳐도 대개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이 얼마나 대단하고 그 종류도 많은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지금 일어난 일을 앞으로 일어날 일의 아주 작은 부분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스토아학파의 신조다. 인간은 절대 자신의 조건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불쌍하고 애처로운 신세인지, 얼마나 많은 재앙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인간은 자기 주변을 한 번만 돌아보면 된다. 인간이 어느 곳에 있든 머지않아 비참하고 암울하며 결실을 보지 못하는 생존을 둘러싸고 고군분투하며 안달하고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본 이후 인간은 자기 요구치를 낮춰 모든 사물의 불완전함 속에서 자신을 찾는 법을 배우고 재난을 피하거나 견디기 위해서 재앙을 주시한다.

 

336:20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을 제공하고, 이후 30년은 이 본문에 대한 주석을 제공하는 기간이다. 주석은 본문의 진정한 의미와 맥락을 짚어주고 본문에 담긴 도덕과 섬세한 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346:15

점성술에서는 한 개인의 생애가 행성 내에 미리 정해져 있는 걸로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나이대별로 어울리는 한 행성이 있고, 인간의 삶이 연이어 행성들의 영향 아래 있다는 관점에서는 생애가 행성 안에 정해졌다는 사실은 맞다. 열 살이 된 인간은 수성이 지배한다. 인간은 수성처럼 가장 좁은 원 안에서 빠르고 가볍게 움직인다. 이 시기에 인간은 작은 일에 마음이 흔들리긴 하지만 교활함과 능변의 신의 가호 아래 많은 것을 쉽게 배운다. 스무 살이 되면 금성의 지배가 시작된다. 사랑과 여성에 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해 버린다. 서른 살은 화성이 지배한다. 이때 인간은 강하고 사납고 대담하고 호전적이다. 마흔 살은 네 개의 소행성이 지배한다. 인생의 반경이 넓어지고 인간은 건실한 자가 된다. 다시 말해 케레스(로마 신화 속 곡식의 신_역주)의 힘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화덕의 신 베스타의 힘으로 자기 가정을 꾸리고, 지혜의 신 팔라스에게서 필요한 지식을 얻는다. 팔라스의 아내 유노는 가정의 여주인으로 군림한다.
쉰 살이 되면 목성이 지배한다. 이 시기의 인간은 이미 긴 세월을 살아왔고, 현세대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다. 그는 (자기 개성과 상황에 따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더는 명령을 받지 않고 자기가 직접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 이런 인간이 현재 자기 영역에서 지도자나 통치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 이때 목성은 자오선(천구의 두 극과 천정을 지나 적도와 수직으로 만나는 큰 원_역주)을 통과하며 인간도 목성과 함께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예순 살이 되면 토성이 나타나는데 이와 함께 납처럼 무겁고 느리고 완고함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천왕성이 등장한다. 이때 인간은 행성의 이름 그대로 하늘로 올라간다. 해왕성(안타깝게도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은 고려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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