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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그스 갤러리, 종로 ]
216:5
"내가 믿는 게 정의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
"쉬워."
내 주인이 말했다.
"통쾌했으면 정의가 아니야."
...
이전에 주인은 '제 정의를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놈은 정의가 아니야'라고 했다. 그 이전에는 '그 사람이 제가 싸우는 상대보다 훨씬 강했고 그걸 알고 있었다면 정의가 아니야'라고 했다.
그보다 이전에는 '그 어떤 명제든 모든 상황에 적용하면 정의가 아니야'라고도 했다. (후략)
[ 걷다, 서다, 돌아가다 ]
241:1
걷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아, 정말 오랜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성큼 다가가 덥석 손이라도 잡을 뻔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건만, 나눈 주책 맞은 마음을 억누르며 짐짓 모른 척 말을 붙였다.
"걷고 계시네요."
그 사람은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누가 뭐라고요?"
"걷고 계시다고요."
그는 어리둥절해져서는 자기 다리를 들고 힐끗 보더니 말한다.
"누구나 걷잖아요. 자연스러운 일이죠."
네.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걸음을 내디딘다. 검은 우주 한복판, 금빛 타일 하나가 그의 발밑에 생겨나 엷게 빛난다. 정수리에 흰 머리카락이 두엇 늘어난다. 피부의 윤기가 줄고 눈가에 주름이 는다.
"그래요."
나는 뒤에 남아 중얼거린다.
"걷는 사람도 있어야죠."
나는 내 낡은 자리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입김을 호호 불며 바닥에 손장난을 했다.
밤마다 시간의 우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다. 내가 꿈에서 시간을 물리적인 실체로 본다는 말을 하려면, 물리학과 교수님을 찾아가야 할까, 심리학과 교수님을 찾아가야 할까. 교수님, 그 이론이 맞았어요. 시간은 선이 아니라 면이에요. 흐리는 게 아니라 펼쳐져 있죠. 우리가 그 위를 한 발 한 발 걷는 거고요. 그리고 밤마다 잠이 들면 자기 생애에서 가장 원하는 시간대로 돌아가죠. 물론 깨어나면 다 잊어버리지만...... 네, 정신의학과로 가봐야겠군요.
나는 밤마다 이 자리로 돌아온다. 스물아홉일까, 서른일까, 정규 교육은 어찌어찌 다 끝냈고 아직 활기와 체력은 남아 있을 시절, 학자금 빚을 떠안은 취업 준비생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닥친 문제의 전부였던 무렵. 나는 여기서 더 자라지도 어려지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저어기쯤 있다. 늘 저 자리다. 오십 세쯤일까. 가족 몰래 빼돌린 재산을 주식으로 탈탈 날린 날이다. 아버지는 매일 그날로 돌아간다. 재무제표를 구멍이 나도록 들여다보며 그날의 어느 경로에 다른 길이 있었는지 뒤적인다. 밤마다 잠꼬대로 중얼중얼하고, 눈을 감으나 뜨나 그날을 되새긴다.
동생은 또 저어기쯤 있다. 대학에 합격한 날이다. 그 빛나는 타일 위에 서서 찬사를 기대하는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날처럼 온 세상이 그 애를 사랑해준 날은 다시는 오지 않았기에. 상사에게 신나게 터지고 술자리에서 얼굴이 벌게져서는 합석한 아무나 붙들고 말한다. 내가 뫄뫄대 다닐 때는 말이죠......
둘 다 사람을 그리 오래 만나지 않는다. 실은 하루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래야 같은 말을 영원히 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한탄을 늘어놓고 동생은 낯선 사람만 보면 언제 대학 이야기가 나올까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그래더 선 자리가 불행한 날인 것보다야 행복한 날이 낫겠지. 어차피 일생 같은 날에서 살아갈 바에야.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단지 펼쳐져 있다. 나는 이 개념을 오직 꿈속에서만 이해한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이라 느끼는 것은 단지 엔트로피의 증가며, 무질서의 증가다. 깨진 컵은 다시 붙지 않고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이 우주에서 무질서는 늘어날 뿐, 줄어들지 않기에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란다.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무질서가 느는 건 앎이 늘어나서다. 우리가 세상을 잘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질서가 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거리에 똑같이 생긴 나무가 쪽 고르게 정렬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나무가 모두 다른 나무고, 다른 껍질, 다른 나이테, 무수히 다른 이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질서는 사라진다. 잘 모를 때엔 '외국인만 있다'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는 풍경도, 그들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 다른 인종, 다른 신체와 다른 개인사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질서는 사라진다. 그렇게 모든 개체가 독특해지면 세계는 온전히 무질서해지고 시간은 종말을 맞는다. 우주도 끝이 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앎이 멈추면 시간도 멎는다. 앎이 멈춘 사람의 시간은 멎으며 그 사람은 더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람마다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이다.
다들 어느 시기에선가는 멈춰 선다. 세상이 온전히 무질서해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므로, 세상은 조금이라도 흑백으로 구분되어야 하며 조금이라도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하므로. 그래야 삶을 견딜 수 있으므로. 그런 무질서의 끝에서는 생각마저도 종말을 맞으므로.
더해서 앎이 사라지면 시간도 되감긴다. 어린 날로, 과거로. 점점 뒤로.
"엄마아, 엄마."
옆에서 한 아이가 내 옷깃을 당겼다.
나는 칭얼대는 아이를 안아 들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
"엄마, 엄마."
아이는 내게 뺨을 부비며 엄지를 쪽쪽 빨며 좋아라고 칭얼댄다. 내 품에서 잠시 옹알거리던 아이는 폴짝 튀어 나가 다음 칸으로 가려 한다. 나는 황급히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애처롭게 애원한다.
"아가.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 그냥 우리 여기 있자. 이쯤이 딱 좋지 않니."
"하지만 나는 가고 싶은데."
아이가 저쪽을 가리킨다.
"이제 겨우 적응했는데."
나는 안타깝게 말한다. 아니, 실은 적응할 새가 없다. 아이는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익숙해질 만하면 변한다. 아이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되지 않는걸."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자연스러운 일인걸."
아이는 내 손을 뿌리치고 한 칸 뒤로 간다.
거기서 아이는 제 방문 앞에 서 있다. 그러며 문고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문을 어떻게 여는지 까먹었네."
아이는 그리 말하며 내가 도와주리라는 굳건하고도 천진한 신뢰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본다. 내가 문을 열어주러 가는데 아이의 가랑이 사이에서 노란 물이 줄줄 샌다. 나는 서둘러 수건을 챙겨 들었다. 기저귀도 사야 하겠네. 기저귀 가는 법도 다 까먹었는데.
"아가, 너는 너무 빨리 가는구나."
내가 바닥을 수건으로 닦는데 아이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엄마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웃음을 지었다. 사랑스럽고 대견하다는 얼굴로 말한다.
"네가 고생이네."
아주 잠시 시간을 되찾은 엄마가 말라빠진 손으로 내 머리를 토닥인다.
"고생은 뭘."
나는 답한다.
"그렇게 자꾸 가다가 사라지지만 않으면 좋겠네."
그러자 엄마는 곤란하다는 듯 샐쭉 웃는다.
"하지만 사라지겠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걸."
엄마는 다시 아이가 되어 폴짝 뛰어 한 칸 뒤로 간다.
엄마는 매일 한 칸씩 뒤로 간다.
작년에 칠십이었던 엄마는 지난달에는 오십이 되었다. 그래서 부쩍 나이 든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 나이와 마음 그대로 나를 새로 받아들여주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래 나를 돌봐주네. 누가 이래 잘 키웠니. 예쁘기도 하지, 참하기도 하지."
엄마는 그리 말하며 내 등을 토닥였다.
엄마는 저번 주에는 열 살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다섯 살쯤으로 돌아간 듯하다. 내일은 또 몇 살이 될까. 한 살이 되면 더 갈 데가 없겠지. 그렇게 시간의 지평 너머로 사라지겠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내 아이가 된 엄마는.
아가, 아가. 나는 허둥허둥 쫓아간다.
조금만 천천히 가도 괜찮은데.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되었는데.
아가, 아가. 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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