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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8

이윽고 남자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훌륭한 곳에 취직하고 비교적 잘나가는 회사를 차리고 제법 근사한 아파트도 장만하는 등 상당히 잘살았다고. 아이들이 그보다 더 훌륭한 곳에 취직하고 더 근사한 아파트를 장만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매일 밤 휴대용 계산기를 손에 쥐고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필요 없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모은 돈을 전부 어느 부동산 개발업체에 투자했다고. 어깨가 되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니까. 어렸을 때는 그 위에 앉아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나이를 먹으면 그걸 밟고 서서 구름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게, 그리고 가끔 휘청거리고 불안해지면 거기에 기댈 수 있게. 우리도 뭐가 뭔지 잘 모르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아이들은 우리를 믿으니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아느냐고. 그래서 남자는 남들을 따라 했다. 아는 척했다. 아이들이 응가는 왜 갈색이고,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북극곰은 왜 펭귄을 먹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아는 척 했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었다. 가끔 그가 그걸 깜빡하고 아이들 손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 때가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열두 살짜리에게 네가 어렸을 때는 내가 너무 빨리 걸어서 네가 달려와 내 손을 잡았다고. 그때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손바닥에 닿았던 너의 손끝. 내가 얼마나 많은 일에 실패했는지 네가 아직 몰랐던 그때.

남자는 모든 것에 대해 연극을 계속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부동산 개발업체에 투자한 것이 안전한 투자라고 했다. 모두 알다시피 부동산 가격은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그 예상이 빗나갔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 금융 위기가 시작되고 뉴욕의 어느 은행이 파산하자 머나먼 지구 반대편의 어느 조그만 도시에 사는 남자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변호사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을 때 서재 창밖으로 그 다리가 보였다. 아침 이른 시각이었고 요맘때치고 유난히 포근했지만 날은 꾸물꾸물했다.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연극을 계속했다. 아이들의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속삭였고, 아이들이 눈을 부라리며 한숨을 쉬자 심장에 금이 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강가로 차를 몰았다. 주차하면 안 되는 곳에 차를 세웠다. 열쇠는 차 안에 그냥 두었다. 다리로 걸어가 난간 위로 올라갔다.

 

 

144:7

심리 상담사는 돌려서 말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얘기했다. "이래저래 충돌하는 경우가 많으신 모양인데요. 발끈하기 전에 이 세 가지를 자문해보는 걸 추천할게요. 하나, 문제의 그 사람이 나를 해치려는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둘, 그 상황과 관련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은 없을까. 셋, 이렇게 부딪침으로써 얻는 소득이 있을까."

 

 

145:6

"... 돈을 어떤 데 쓰세요?"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사는 데 쓰죠."
심리 상담사로서는 처음 듣는 대답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비싼 음식점은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요. 비행기 1등석은 가운데 자리가 없고요. 특급 호텔에는 스위트룸 고객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 따로 있죠.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이 남들과의 거리예요."

 

 

148:14

심리 상담사는 그녀의 대답을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세상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한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죠. 적어도 세상을 지금보다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지는 않다고, 자기가 옳은 편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 그러니까......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더라도 그 행동이 좋은 일에 쓰였다고 믿고 싶은 거죠. 기본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니 자신이 도덕적 잣대를 어겼을 때를 대비해 변명을 마련해야 하는 거예요. 범죄학에서는 이걸 중화 기술이라고 부를 거예요.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신념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믿음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아무튼 악행을 정당화할 방법이 필요하죠. 왜냐하면 저는 솔직히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거든요."

 

 

156:1

불안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했다. 아무리 멍청해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잘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297:6

사라는 그때 상담실을 둘러보았다. 벽에 근사한 자격증이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으리으리한 졸업장을 받은 사람들은 그걸 책상 서랍에 넣어둔다.

 

 

300:15

그녀는 재난이 발생해 원조 기구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면 가끔 외국으로 나갔고 (후략). 하지만 야크는 (중략) 요란하게 고함을 질렀다. "왜 거기를 갔어요? 왜 위험한 짓을 하세요? 왜 가족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무섭고 불안한 마음에 소리 지르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평소처럼 대답했다. "항구에 머무는 배가 안전하지만 배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잖니."

 

 

318:11

"카지노 직원이 그랬어요. 돈을 잃어서 망가지는 사람은 없고 잃은 돈을 다시 벌려다 망가지는 거라고. (후략)"

 

 

348:20

"크누트하고 나는 맨 처음 서로에게 반했을 때 어떤 식으로 싸울 건지 같이 정했어요. 크누트가 첫사랑의 흥분이 조만간 가시면 좋든 싫든 싸우게 될 거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전쟁의 원칙을 정한 제네바 협약처럼 우리도 합의를 보았어요. 크누트하고 나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일부러 하지는 말자고 했어요. 단순이 이기기 위해서 싸우지도 말자고 했고요. 그러다 보면 결국 한쪽의 승리로 끝날 테니까요. 그런 결혼생활은 유지될 수 없어요."

 

 

379:6

"(전략) 읽은 책을 보면 그 사람을 백 퍼센트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으니 책은 정말 신기한 물건이지 뭐예요.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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