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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사이에 ]

78:18

"(전략) 통조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실 겉에 붙은 라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본성이 아니라 드러난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과거는 밀봉된 채 선반 위에 올려놓은 통조림과 같아. 그래서 우리는 라벨만 보며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거기 통조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80:11

(전략) 들어보니 스파게티 인생론이랄까, 아무튼 이런 이야기였어. 우리가 상상하는 인생은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비닐로 포장한 스파게티 면과 같아. 각자의 인생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거지.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야. (중략) 실제 우리 각자의 인생은 그 포장을 뜯어 삶은 뒤, 팬 위에서 소스와 버무린 뒤의 면과 같아. 포장 상태에서는,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모두의 인생이 하나의 시간을 따라 진행되지만 실제로 우리의 인생은 소스에 버무릴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뒤엉키는 스파게티 면과 같다는 거야. 소스 팬 안에서 한 가락의 스파게티 면은 자신의 형태만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뿐, 다른 면의 형태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거지.

 

 

[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

112:10

"(전략)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그 마음을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발밑에 광부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광부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저는 여전히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거기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이야기의 저는 아내를 계속 존재하게 했습니다."

 

 

[ 관계성의 물 ]

166:11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워할수록 더 미워하게 된다. 매 순간 관계가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 고작 한 뼘의 삶 ]

188:1

소설가의 재능이란 꿈꾸는 것이 전부다. 꿈꾸는 능력은 꿈을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꿈 같은 현실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나와 같은 빛을 보니? ]

214:1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벨 에포크Belle Epoque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이 떠오른다. 프랑스어 벨 에포크란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 전까지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으로 번성했던 시절을 회고적으로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고적으로'라는 말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이어지지 않았어도 전쟁 전의 유럽이 그토록 평화롭고 풍요롭게 기억될 수 있었을까? '회고적으로'라는 말은 그뒤에 일어난 끔찍한 일, 즉 전쟁을 겪고 난 뒤에야 그 시절이 제대로 보였다는 뜻이다. 벨 에포크를 살아가는 살마은 그 시절이 벨 에포크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 거기 까만 부분에 ]

238:6

천문학적인 발견이란 관측을 통해 어떤 별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말하자면 어떤 별은 우리가 보는 순간부터 반짝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관측이 별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

261:11

불운과 불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불운은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다.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미야노가 병에 걸리게 된 건 불운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운명이나 팔자 같은 자기 바깥의 이야기에서 찾으면 불행이 된다. 그래서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고 이소노는 말한다. 불운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라 인생의 어느 지점에 위치시키느냐에 따라 불행으로도, 재밌는 에피소드로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미야노는 철학자로서 엄청난 일을 감행한다. 암이라는 최악의 불운 앞에서 암 환자라는 불행의 스토리에 빠지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는 불운을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인생이라는 한 줄기 선에 녹여내기로 한다.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 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우연을 '나'의 인생으로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우연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한다. 미야노가 모임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인 이소노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태도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설사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265:3

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남긴 지침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그는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제일 먼저 이기적인 마음을 버린다. 자기 이익부터 챙기려는 탐욕의 마음에서도, 나만 손해본다는 두려움의 마음에서도 벗어난다. 그다음으로 겸손해야 한다.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을 치켜세우려는 욕망에도 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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