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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 최은영
68:16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른 학생 하나가 내 말을 자르고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노동유연화 정책, ..."
"지금 뭐라고 했죠?"
강사가 토론 중간에 끼어든 적이 거의 없었기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노동유연화 정책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그 전에 뭐라고 했죠?"
그는 당황하여 귀가 붉어진 채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앞서 얘기한 학생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죠. 그것도 말을 끊어가면서."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 수업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앞의 학생에게 사과하세요."
그는 온통 붉어진 얼굴로 내게 사과했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끊었을 때, 그리고 내 발언을 평가절하했을 때 약간 무안했을 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내 말을 끊고, 내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이 내게는 익숙했다.
72:18
상대의 말을 자르거나,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원칙은 그때의 수업 이후로 잘 지켜지는 편이었다. 한 학생이 대화를 독점하려고 할 때도 그녀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그녀가 따로 지적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은근하게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대는 이런 지식을 알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듯 '~거든요'라는 종결어미를 즐겨 썼다.
75:18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 인지 공간 ] - 김초엽
235:22
"잘 들어. 공동체의 기억이 변형됐어. 세번째 달이 밤하늘에서 사라지면서 사람들도 더는 세번째 달을 이야기하지 않게 됐고, 최초의 이야기마저 지워지고 있는 거야. 마치 우리에게 세번째 달이 없었던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이브의 말을 듣기 전까지 나의 머릿속에는 세번째 달에 관한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방금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때는 저 밤하늘에 세 개의 달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236:18
이브의 말은 옳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인지 공간에는 여전히 세번째 달에 대한 격자 정보가 남아 있었다. 그런 동시에 공동체는 세번째 달을 잊어가고 있었다. 인지 공간에 머무를 때 사람들의 기억과 지식은 공동체의 평균값으로 수렴된다. 그것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동 지식이다. 인지 공간의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와 천문학 개념들을 살펴볼 사람은 거의 없다. 이야기 속에서 잊히면, 개념에 대한 기억도 쇠퇴한다.
그날 헤어지기 전 이브는 나에게 말했다.
"공동 지식은 완벽하지 않아. 어떻게 세번째 달을 잊을 수 있지? 제나, 정말로 공동 지식이 우리의 모든 기억을 점령하게 둬도 된다고 생각해?"
238:20
기억의 소멸은 빨랐다. 며칠 전 학자들이 (죽은) 이브에 대한 기억을 격자에 영구적으로 기록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을 들었다. 어차피 모든 오래된 지식은 낡아가며,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되고, 기억될 가치가 없는 지식은 지워진다.
241:10
몇 년간 인지 공간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이브가 만들려고 했던 개별 인지 공간인) 스피어를 연구했다. 이브의 아이디어를 확장해서 스피어가 실제로 개별 인지 공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처음으로 스피어를 공동체에 공개했을 때 사람들은 그거싱 마치 신성모독이라도 되는 듯이 나를 대했다. 스피어는 분열을 만들 것이라고, 서로 다른 지식을 갖게 할 거라고,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다.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하지만 스피어가 정말로 분열일까? 스피어를 갖게 된 우리는 정말로 같은 격자를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지 모른다. 공동 인지 공간을 거닐면서도 각자의 스피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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